1

 

 

 

 

 헛똑똑

지금은 침묵할 때

 닫혀진 교회문

대통령과 장사꾼(1)

대통령과 장사꾼(2)

예배가 있는 곳

뻔뻔한 감사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하나보다 둘?

그리스도인의 상식

회비와 헌금

평안이 있는 교회 뒷자리

교회의 수준

2

헛 똑 똑

 

바야흐로, 한국 기독교의 르네상스시대입니다.

종교인구에서도 불교보다 우위에 섰으며,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그리고 군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요직에 기독인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CCC를 비롯한 수많은 기독 써클에서 훈련받은 예수의 제자들이 40대의 중진으로 교회의 중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목회자 역시 그 어느때보다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며, 또 수많은 목회자 재교육기관에서 쉬지 않고 훈련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러면 안된다고 서로를 향해 아우성치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목회자는 더 이상 퍼줄 것이 고갈 나, 메마른 샘이 되었고, 지성인을 자부하는 평신도들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교회 뒷자리에 뒷짐지고 앉아 심판자이고 평론가로서 행세합니다. 순종하고 따라 줄 사람은 없고 모두가 지도자이며, 내 생각과 이론들을 들어달라 조르는 설교가입니다. 주님의 일(작은 일에 충성하는)을 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똑똑하다고 느끼는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내려가는 훈련이 필요한 때가 아닌지요?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발 걸음은 땀을 요구하지만, 내려가는 훈련은 눈물을 요구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섬기며 봉사하는 자에겐 기쁨과 평강이 있습니다. 우리를 불평과 원망케 하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헛 똑똑'입니다.

 

"네가 눈 멈은 네 죄 아니며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  

옳고 그름에 심판자의 자리에 않게 마시고,  눈먼자 되어 기쁨으로 사역케 하소서.

 

 top. . .

3

 

지금은  침묵할 때

 

고난주간, 월요일 아침, 만나는 그리스도인마다 한 마디씩 합니다. '어저께, T.V. 보았느냐? 어떻더냐? 요즈음 한국교회, 한국목회자. . ."운운하며 다들 한 다디씩 거듭니다.

집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내용인 즉, 한국을 대표할 만한 교회와 그 목회자의 소위 말하는 비리에 대하여, 교단 차원의 비리까지 해부하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조금 있으면 변명차원의 성명도 발표될 것이라 생각은 되지만. . . .

요즈음 모든 사람들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요즈음 교회...' 운운합니다. 책임질 사람은 없지만 원가 잘못되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자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고난 주간입니다. 이사야 53장의 주님의 수난예고 내용 중에 ". . . .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하는 말씀을 한 주간 내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선지자적 외침보다 십자가를 지는 침묵이 필요한 때가 아닌지요?  

"침묵보다 나은 말을 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지만 과연 그런 말이 있을지.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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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닫혀진 교회 문

 

며칠전 아침 교회에 와 보니, 방석이 흐트러져있고, 사방에 가래침, 그리고 암모니아 섞인 물, . . . .

냄새를 지우기 위해 방석과 이불을 다 빨아야 했습니다. 비슷한 일이 근래 어려 번 반복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교회 문을 잠그기 시작했습니다. 이유인즉, 난로도 있고, 상습적으로 계속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 .

우리 주님은 그 시대에 가장 저주받은 병인 문둥병자, 혈루병자, 소경된 거지 등을 만나시면 민망히 여기시고 또 고쳐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들의 편이셨던 것입니다.

모든 이에게 열려있어야 할 교회 문을 잠그다니. . .  무거운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보고 민망히 여기시지 않을까?

울어야 할 것은 불쌍한 주정꾼을 향해서가 아니라, 문을 잠그어야 하는 믿음없는 내 자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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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통령과 장사꾼 (1)

 

일천만  성도를 자랑할 즈음, 드디어 장로대통령(김영삼)의 취임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드러내야 할 그 존귀한 대통령 자리를 스스로 삼류 돛때기 장사꾼 자리로 전락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름하야, 세일즈 외교를 운운하며, 모든 관심은 오로지 "갱제(Money)"로 통했습니다. 배만 불려주면 만사 OK라는 맘몬 신을 등징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현실로 느끼는 그대로입니다. (I aM  False)

국민소득 일만불의 고비에서 위기에 처한 민족의 현 상활을 어찌 경제정책의 실패로만 볼 수 있습니까? 또 경제 회생만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으로만 믿는다면 이 또한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발싱이란 말입니까?  돈(Money)만 있으면 그 가정은 행복할 것이라고 교육하는 그 사회의 미래가, 그 가정이, 어찌 밝을 수 있습니까? 현 IMF위기는 경제정책의 실패나 지도자의 리더쉽의 결여에서 온 것으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하다면 우리 민족은 여기에서 좌충우돌하다 멈추어 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국민소득 일만불을 지탱할 수 있는 정신적인 공백상태(정신적 공항)가 오늘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라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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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통령과 장사꾼(2)

 

"늙은 창녀가 화려한 옷과 빨간 루즈를 바르고 큰 길가에 나 앉아 있는 모습"

이 말은 함석헌의 그의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한국 역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 놓은 내용입니다. 또, 한이 서려있는 민족이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남에게 해꼬지 한번 못해보고 안으로 분을 삼키며 한을 간직하고 살아온 것이 우리 민족의 역사입니다.

일제 36년간의 역사의 단절, 또, 그에 못지 않은 동족상쟁의 치욕의 역사, 이런 아픈 과거의 한을 간직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은, 잠재된 내면세계의 한을 풀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새벽예배 때마다 그저 한없이 울어야 했던 믿음의 선배들, 여의도에 백만이 넘는 성도가 모여, 이 민족이 살길은 복음밖에 없음을 고백하며, 나라를 위해 부르짖던 함성소리가 아직 귀에 쟁쟁합니다.

그러나 후세 한국 기독역사가들은  "한국의 기독교는 돈과 권력을 얻게되면서 쇄퇴하기 시작했으며 민족복음화는 돈이나 권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겸비하게 무릎꿇음에서 시작됨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할 것이다" 라고 기록할 것이 분명합니다.

기독 역사관을 논하지 않더라도, 이 민족이 하나님 앞에 겸비되어져야 합니다. 이 길만이 이 민족이 살 길입니다. 루즈바르고 화장할 필요 없이. 깨끗이 빨아 입은 검소한 옷 차림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의 불을 새롭게 붙혀야 할 때입니다. 현 IMF위기를 "이 민족이 살 길은 복음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기독인의 재 무장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현 대통령의 부인도 장로라고 합니다.

대통령의 자리는 돈벌어 빚값는 장사꾼의 자리가 아닙니다.

빵으로만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임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겸허히 실천하는 기도하는 대통령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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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예배가 있는 곳      .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 . 내 평생에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 ."라는 506장의 찬송으로 시작된 신학교 입학 첫 예배는 나에게 참으로 감동적인 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8년이라는 세월의 공백을 넘어 또 다시 그 신학대학 강당에서 에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교단 총회라는 이름으로, 올챙이의 틀을 벗은 장성한 목회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성숙한(?)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였지요.

그러나,

아! 하나님 어찌 해야 합니까?예전에 그 감동을 잃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그리스도인은 에배중심 생활이어야 함을 말하지만, 예배는 요식행사요, 중요한 것은 구 후에있는 안건에 더 관심이 있지요. 'X는 제명하고 Y는 이단으로'라는 안건도 중요하고 Z가 총회장이 되어야 함도 중요하지만 일년에 한번 만나 한자리에 모여 예배함에 가치가 희석되고 참석까지 회피하려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지요. 서글픈 마음으로, 헝덩한 강당에 의도적으로 정중히 앉아 30분 개회 예배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첫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예배를 통해 회중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의 논쟁과 주장보다 앞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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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뻔뻔한 감사

 

신학원을 입학하여 대학 기숙사 생활을 할 때이다. 학부 후배들이 불러 주는 전도사란 명칭이 아직 어색하고 그저 만년 학생이고 푼 그런 때. 저녁 늦은 시간, 기숙사에 모여 졸업반 선배들과 대화의 시간이 있었다. 돌아가면서 사역하는 교회와 본인이 담당하고 있는 부서를 소개하는데, 공통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 전임자에 대한 혹평이다. 두 번째, 혹평 다음에 오는 자신에 대한 그런 것. 그리고 여기에, 교회 어른 집사들을 통해 양복이나 기타 심지어 자가용까지 그냥(?) 받을 만큼 자신의 유능함을 자랑한다. '가난한 신학생'이라는 대명사가 왜 생겼을까? 대학까지, 아니 대학원까지 교육받음이, 우리는 이미 수준 이상의 소비성향의 사람들인데. . . . 거기다가 넥타이 메고 구두에 광내고 다니지 않은가? 또, 학생이지만 교회에서 아르바이트 사역까지 하니.

장사하는 사람들은 이윤을 내고, 월급장이는 봉급을 받는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받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개념의 정립은 내겐 참으로 어려운 과제였다. 잘못하면 '넥타이멘 불우이읏'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사실, 졸업하고 첫 사역지에서부터 현실로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은 봉사하면서 물질로도 헌신하는데, 나는 뚜렷하게 헌신도 못하면서 돈만타는 것 같은 부담감이 그것이다. 차라리 나도 다른 일을 하면서 물질적 보상 없는 교회에서의 헌신이 더 당당할 것 같았고 그것이 부러웠다. 월급타는 부교역자로서의 준비안된 풀타임 사역의 출발은 이 부담감 으로 출발되었다. 이제, 개척한지도 벌써 4년이다. 아직 이렇다 할 교인도 없이 시내 2층에 세를 들어있는 개척교회 담임교역자. 교회 차도 있고 시골에 집까지 그냥 얻어 산다. 어떤 모임이 있으면 교역자라고하여 회비 면제다. 어저껜 철물점하는 친구 집사 가게에 들러 밭에 물주기 위한 호수 30m를 당연하다는 듯이 거냥 들고 왔다. 나는 누구이기에?

목회한답시고 참으로 많이 빚지고 산다. 나의 목회에 비추어 보면 목회는 사랑을 줄 때보다 받을 때가 더 많다(큰 교회도 마찬가지 아닐까?). 빚진자가 어찌 목을 곧게 하고 세울 수 있는가? 그러나, 이 빚짐이 부담으로만 다가와서는 안된다. 부담이 아닌 감사함으로 수용되어져야 함을 알지만, 그러기엔 너무 뻔뻔한 것 같고. . . . . . 요즈음, 작은 자유함이 내안에 평안으로 자리잡는다. 감사함이 있다. 뻔뻔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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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TV 삼일적 특집극 중 로빈후드를 재미있게 보았다, 그러나, 목회자인 내겐 그 뒷맛이 씁쓸해져 옴을 느낀다. 극중에 간간이 나타나는 성직자의 모습이 그 이유이다. 또, 어저께 뉴스의 첫 헤드라인을 신앙의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신학대학의 폭동이 화려하게 장식된 것이 오늘의 이 우울함을 부추키는 이유이리라. 어찌 할 것인가?

일반대학에서의 폭동은 그럴 수 있다는 대중들의 견해, 그리고 그들이 유급되는 것은 잘 보지 못했다. 신학대학이라는 이유, 그리고 그들의 문제들을 신앙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경찰서에서 그 해결을 요구한 것이 세상의 웃음거리로 장식되게 한 이유일 것이다. 종종, 교회 역사를 다룬 책이나 영화속에서, 신앙의 전성기를 거쳐 화려한 물질문화속에 퇴색되어가는 성직자들의 모습들을 해학적으로 그리고 세상의 웃음거리로 곧잘 표현한다. 세상이 윤리적으로 그리고 사회 정의가 퇴색될 때 그들은 자신들의 타락한 모습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시대에 편승되어 타협하는 성직자들에 대하여는 가혹하라 민큼 비판을 하고 또 조롱한다. 사회가 부피할수록 소금의 역할은 클 수밖에 없다. 로빈훗 같은 화려한 정의에 사도는 아니더라도 숨겨 자신을 녹여 부패를 막는 소금은 될 수 있어야 겠지 않겠는가?'녹지 않는 소금은 세상에 밟혀 버리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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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하나보다 둘?

 

며칠 전 지방회 목사님과 춘천에 볼일이 있어 국도를 통해 가을 경치를 구경하며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고속도로를 지나지 않고 봄평 뒷길로 해발 1000m가 넘는 고개를 넘어 그야말로 강원도 산길을 달렸다. 가을저녁 노을에 밥짓는 연기 나는 시골 풍경은 그야말로 한폭에 그림 이였다. 어디쯤 왔을까, 마을 한 곁 아담한 곳에 시골치고는 꽤 큰 교회당이 보인다. 시골교회다. 사각 예배당과 예배당 현관위로 올라간 십자가 탑이 정겹고, 교회마당 한 곁에 세워진 단풍나무가 붉다못해 햇볕에 그을린 것처럼 검붉다. 그 옆 논길에 소가 끄는 달구지도 볼 수 있었다(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아! 그런데, 한 모퉁이를 돌자마자 그 촌 시골에, 마을 호수래야 20호가 안되는 그 촌 한 마을에 교회가 또하나 있지 않은가? 동행한 목사님들이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신다. '거 꽤나 싸워겠군. . . .' 내용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름답지 못하든지, 아니던 그러했던 추억을 간직한 두 교회임에는 틀림없다. 누구에 잘못일까? 모두가 재판관이 되어 한마디씩하며 생각에 옳다는 쪽에, 혹은 인맥에 이끌려 편이 만들어 졌을게다.

누구에 잘못일까. 누구편이 옳았을까. 그것이 중요할까?

분명한 것은

이 둘은, 떨어짐이 아닌, 언젠가 만남에 아름다음을 위해 만들어 졌음애라. 하나보다 둘에 사랑함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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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상식

 

신학생 때, 대학 동창생을 따라 수원시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시내버스를 타고 거리를 구경하면서 한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원시내에는 교회가 참으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한 블록을 지나서 한 교회가 아니고, 한 건물을 지나 한 교회, 아니 같은 건물에 각기 다른 두 개의 십자가가 올리어 진 것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함께 동행한 친구 曰,"저 교회 둘 다 자립하지 못했을 텐데, 하나로 합치면 안돼?. 저 교회 목사들은 다 뭐 먹고살지?" 교회를 모르는 친구의 지나가는 말이였지만, 지금까지 내 머리 속엔 충격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 강릉시내에서 건물 2층에 세를 들어 교회를 개척하고, 주일학교 학생들이 이 교회 저 교회 옮겨 다니며 유세부리는 것을 볼 때마다, 그 친구의 말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불가능하지요.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교단도 틀리고, 누가 담임목사가 된단 말입니까? 안돼지요. 상식적으로 통하지 않는 말이예요" 지금의 상식적인 나의 생각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 친구 역시 아무 의도 없이 그저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으로 한 말이고, 목회자인 나 역시 목회 통용에 따른 지극히 상식적인 답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어느 상식이 옳을까요?

세상 사람은 두 교회가 합칠 수 없다고 해도, 예수 믿는 사람은 달라야 합니다. 교회 행정상 한 사람의 최고(低) 책임자(servant)가 요구된다면, 서로 낮은 자리에 서고자 하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상식적인 해답인데. 유치부 공과공부 해답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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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비와 헌금

 

전반기 저희교회 한달 평균 헌금이 000원 정도로 결산이 됩니다.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께 드려진 우리의 최선의 헌물이지만, 교회의 실제적 필요을 채우기에는 위기의식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행정을 담당하는 재직들이 이제는 갹출이라도 해서 제정을 메울 수밖에 없다고 하는 마음의 각오를 하는 같습니다.

작년 가을 역시, 그런 각오로 제직들이 모였지만, 어느 한 가정이 새 가정을 꾸미고(결혼) 드려진 감사헌금이 그 공백을 메울 수 있게 하였고, 지난 6월은 어느 교인이 취직하여 첫 월급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림으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헌금은 결코 교회 제정 적자를 메우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음을 확신합니다.

교회의 어려운 재정을 보고, 우리가 이제 희생하여 드려야겠구나 하는 각오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생활에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감사의 제목이 넓어질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와, "우리의 일터에서 수입(십일조)이 늘어날 수 있게 하옵소서"하는 연합된 기도가 요청됩니다. 교회의 필요를 위한 갹출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우리의 감사와, 온전한 기쁨을 빼앗아갑니다.

교회의 재정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곧 우리 가정과 자신을 위한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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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평안이 있는 교회 뒷자리

 

교회에는 부담없이 그저 평안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그런 자리가 필요합니다. 억지로 웃으며 아는체할 필요없이 시달렸던 한 주간을 되돌아보며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0여명의 작은 개척교회 예베를 인도하다 보니, 그런 빈 자리를 제공하지 못함이 못내 아쉽습니다. 수년을 주일학교에 자녀를 보내주는 부모님과 또 그동안 알고 지내는 동네 이웃들도 있기에 그들의 마음이 감동될 때 부담없이 교회 뒷자리에서부터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열려있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어쩌면 이 교회 뒷자리에서 묵묵히 기도하며 하나님을 깊이 알아기기 원하는 그들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 더 큰자로 인정될지 모릅니다. 앞에서 달고 달아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까지 잃어가는 앞선(?)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평안한 뒷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앞선자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치부를 감추고 거룩의 외적 모양세만 갗추려는 것을 성경은 회칠한 무덤이라고, 더 나아가서 독사의 자식이띬고 예수님은 책망합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앞선자의 복음일지 모릅니다. 구태여 드러난 치부를 감추려는 노력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근래, 이상한 현상을 보았습니다.

교회 뒷자리가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초신자들의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지식인들(?)의 피난처, 아니 피난처가 된다면 그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주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피난처가 아니라 관중석이 되고있음이 안타깝습니다. 관중도 관중 나름입니다. 선수들에게 힘을 주는 응원을 하는 관중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언제부턴가 '그것 봐라 그러니까 안되지'하면서 선수들의 실수를 보면서 자신이 하면 더 잘할 수 있는 것처럼 안타까워 할 뿐입니다. 이런 관중들이 많을 때, 초신자들에게 드리어 주어야 할 그늘도 사라질뿐더러, 선수 관중 모두가 김빠짐니다. . 열기없는 경기에 구경꾼과 해설자만 많은 것이 작금의 한국교회가 아닌지요. '달고 달아 지쳐있는 앞선자' 보다, 뒤에 서서 나는 이 일과 무관하다고 손 씻고 있는 구경꾼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는 더 클 것입니다. 그들이 쉼을 찾는 초신자들의 평안한 뒷 자리를 빼앗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1. 교회의 평안한 뒷자리, 그 공간은 십자가를 지는 앞선자의 눈물로 이루어 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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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수준   

 

가끔, 그 교회의 수준을 논할 때, 목회자의 수준이 곧 그 교회의 수준과 동일시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의 명함에 여러 가지 타이틀을 붙이게 했고, 담임목회자가 박사학위라도 취득케 되면 온 교회가 잔치를 베풀며 자랑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교회 부흥에 좋은 역할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로인하여 목회자는 언제부턴가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섬기는 기쁨을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해 '존귀 영광 모든 권세'의 십자가를 홀로지고 괴로워하는 것이 오늘날 목회자의 모습은 아닌지요? 이러한 공동체에 합리적인 의사결정과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카리스마의 권세로 복종을 요구하며 돌진하는 왕과, 환호하는 백성의 조화는 금방이라도 온 천하를 정복할 것 같기에, 왕의 결정에 異意를 다는 것은 공동체의 사기를 꺾고 전진을 해치는 방해 자로 여겼습니다. 합리적인 신앙(이성)을 가진 사람은 '왕' 하나로 족합니다. 나머지는 그저 따르면 되는(삿 9:15)卒, 피흘리는 군사로 족합니다.

언제부턴가 교회의 수준을 논할 때, '단기간에 얼마큼 성장시켰는가?' 라는 말로 모든 것을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 성장을 이끈 한 사람의 지도자가 공동체의 모든 것을 대변합니다. 성령의 불길도 마치 시대의 유행을 따르는 같습니다. 마치 빈 냄비 달아오르듯 한 사람의 리더쉽에 금방 뜨거웠다 쉬 식어집니다. 역사와 전통을 갖고 점진적인 갱신을 이루어 가는 공동체가 아쉽습니다. 이러한 공동체는 결코 한 사람의 독주에 끌려 다니거나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습니다. 합리적 의사결정을 이루어 가는 주체적 개인으로 설줄 알기에, 회중의 의견을 존중하며 자신의 뜻을 의지적으로 복종시킬 줄 앎니다. 성령도 교회 회중 가운데 운행합니다. 교회(회중)의 검증 없이 홀로 성령 받았다고 날 뛰는 도취적 사명 자로 하여금 자신을 냉철하게 바로 볼 수 있게 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자기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고집하며 상대방의 의견을 무시하려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믿음'을 운운하고 나오면 설득할 제간이 없지요. 성숙한 신앙의 열매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회중의 결정이 잘못될 때도 참 많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결정에 따라가기만 한 것보다, 미숙한 회중의 실수에서 더 많은 것을 얻게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큰 교회는 더 커지고, 중·소형 교회들이 고전을 겪는 한국 개신교회의 카톨릭화 형상을 봅니다. 교회(회중)와 무관한, 국가 행정구분상의 기독인이 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水準이란? 성가대의 실력, 예배당 분위기, 설교 내용, 선교와 구제비 액수, 통성기도의 뜨거움, 새벽기도회의 참여도, 전도한 숫자, 목회자의 학벌이나 능력, 이 모든 것보다 그 교회 회중의 수준을 대표해 주는 것은 바로 "회중의 의사결정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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