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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심 저서 要略

             

 

 나우웬의 저서는 명구의 나열이 아닙니다.

저자의 인격과 만나지 못하고, 좋은 구절만 뽑는 독서법에서 탈피하여.

나우웬이라는 한 사람과  인격적인 친근함을 갖고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의 저서들은 전권을 통해 마치 소설처럼 기승전결로 펼쳐 나아가기에,

그 중심 내용을 잡아 놓은 것으로

나우웬의 영성을 가장 잘 볼 수 있는저서입니다.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시간.  외롭지 않은 시간 되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두란노)        모든 것을 새롭게(두란노)         살아있는 기억매체(성바오로) 

  1

예수님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Jesus)

 

(헨리, J.M 뉴엔 지음 / 두란노출판부 옮김. 두란노 78쪽 2000원)

 

 

 

 1장 - 현실 지향에서 기도로

 

유혹 : 현실적이 되라

나는 미래의 크리스찬 지도자들은 완전히 현실에 부적절하며 자신의 연약한 자아밖에는 줄 것이 없는 그런 모습으로 이 세상에 서 있도록 부름 받았다고 확신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 오셨던 방법입니다.

예수님께 닥쳤던 첫 번째 시험은 현실에 충실하라. 즉 돌들을 빵으로 바꾸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역이란 병든자를 치료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며,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한 부르심이 아닌가? 하는 현실적 질문 앞에, 사역자의 자존감은 날로 낮아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칭찬의 소리는 거의 없고 비판의 소리만 가득한 이유도 이러한 무능함 앞에, 사람들은 하나님도 필요 없고 교회도 목사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그 방면에 전문가의 의견에 더 귀를 기울이기 되었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우리 시대의 이룩된 모든 위대한 성취 이면에는 절망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성공지향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더 깊은 공허감과 자신을 무용지물로 깊이 자학하는 감정이 깊으며,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고 싶을 때 나와 함께 있어 줄 그분을 찾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의 러더쉽은 모든 화려해 보이는 성공 뒤에 가려진 고통을 깊이 이해하고 그곳에 예수의 빛을 비춰 주는 그런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질문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화려해 보이는 성취물을 보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외로움과 절망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아십니까?"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즉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는 예수로 성육신 하신, 곧 "육신의 마음'을 가지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진정으로 아는 사랑입니다. 이런 부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사랑을 사도 요한은 제1의 l사랑이라 불렀습니다.(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제 2의 사랑은 부모, 스승, 배우자 친구들로부터 받는 사랑, 애정, 연민, 격려와 지원 등입니다. 그러나 이 제2의 사랑은 심지어 증오심으로 비화하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면 현실에 적절하고자 하며,성공하고자 하는 욕망보다, 예수님의 사랑 받는 존재란 사실앞에,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없이 자신을 드러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묵상기도

미래의 성직자와 목회자들은 도덕적인 사람이 된다거나 훈련이 잘되었다거나 동료들을 도우려는 간절한 열망과 그 시대의 논쟁들에 대하여 창조적인 대응책을 제시할 능력이 기독교 리더십의 핵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관계에 뿌리 내리지 못한 채 불붙는 이유들을 다루는 것은, 옳은 판단일 지라도 일치보다 분열을 조장할 수 있습니다. 어느편이 옮고 그른지 하는 투쟁들의 대부분이 진리에 대한 영적인 탐구라기 보다 권력쟁취를 위한 정치전이며, 인간관계우ㅢ 밑바닥에 깔려 있는 하나님의 제1의 사랑을 경험하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미래의 진정으로 열매 맺는 크리스찬 리더쉽을 위해서는 도덕으로부터 영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제 2 장 - 유명세계에서 목회로

 

유혹 : 멋있게 보이라

예수님이 받았던 두 번째 유혹은 정확하게 뭔가 굉장한, 그에게 열렬한 환호를 안겨다 줄 그런 일을 해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내 생애를 언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질지모 모르는데 박수만을 고대하면서 이 꼭대기에서 저 꼭대기까지 높고 가는 줄 위를 애쓰는 줄타기 곡예사처럼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역자들이 자신이 돌보는 사람들의 필요에 응할 수도 없는, 소위 실패한 줄타기 곡예사와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우리는 대부분 여전히 생각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성공적으로 잘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경쟁 사회의 분명한 한 측면인 스타 의식과 개인주의적 영웅주의는 교회에서도 전혀 낮선 것이 아닙니다.

 

과제 :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목양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순한 양 떼를 돌보는 용감하고 외로운 한 목자를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이 아닙니다.(마 18:19-20. 막 6:7). 목회란 공동체적 경험일 뿐만 아니라 상호관계의 경험입니다(요 1`0:14-15). 우리는 리더십을 위해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하며, 목양 자체가 다른 사람을 향해 힘을 행사하는 한 방법으로 신권주의적 독재자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치료하는 자도 아니요, 화해자도 아니요, 생명을 주는 자도 압니다. 우리는 우리가 돌보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요. 깨어지고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목회의 신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무제한적이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여는 한 통로가 되도록 우리가 택함을 받았다는데에 신비가 있습니다.

목양은 이 세상의 파워 게임을 본뜬 리더십이 아니라 '섬기는 리더십',이며 이런 리더십은 자신이 섬기는 사람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만큼 자신에게도 사람들이 필요한 그런 연약한 종입니다.

 

훈련 : 고백과 용서

미래의 지도자가 개인적 영웅주의에 빠지려는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 요구되는 훈련은 무엇인가?

고백과 용서는 죄인된 우리 인간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구체적인 한  형태입니다. 나는 목회자들이야 말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제일 죄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종종 갖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육신의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육신 안에 산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몸 안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전체의 몸 안에 사는 것이며, 그 안에서 성령의 임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역은 그 존재 전체로 사역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특별히, 고통이 많은 사람들과 관련된 사역을 하는 목회자들에게는 자신들만을 위한 참으로 안정된 공간이 필요하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에게는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깊은 고통과 투쟁들을 함께 나눌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 속으로 그들을 인도해 줄 그런 사람들과 함께 말입니다.

모든 성직자들이 자신을 위해 그런 안전한 곳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 3 장 - 인도하는 자리에서 인도받는 자리로

 

유혹 : 힘이 최고다

예수님이 받았던 세 번째 시험은 힘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내가 이 세상 모든 나라의 영광을 네게 주겠다."라고 유혹했던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의 가장 큰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는 지도자들이 정치 군사 경제적 힘의 시험에 굴복했으면서도, 말로는 자신의 신성한 힘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을 비워 우리 인간의 모습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해 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 중 가장 고통스러운 역사는 때때로 사랑 대신에 힘을, 십자가 대신에 지배력을, 인도받기 보다는 인도하려는 유혹을 받아 온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나에게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는데, '친밀감'을 두려워할 때 '힘'에 대한 유혹이 극대화 된다는 것입니다. 건강하면서도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키는 법을 모른 채, 힘과 지배력(control)만 내세우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리어십을 행사합니다. 기독교  왕국을 세우려 했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줄 줄도, 또 받을 줄도 모르고 힘으로 만 행사하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도전 : "다른 사람이 너를 데려갈 것이다"(요21:18)

성숙이란 독자적 젊음과 힘의 결정이 아니라, 자신이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기꺼이 이끌려 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힘과 지배력이 리더십이 아니라 무기력(Powerlessness)과 겸손의 리더십 즉, 사랑 때문에 힘의 사용을 계속적으로 포기하는 그런 영적 리더십을 말합니다. 영적 가난은 우리로 하여금 인도받는 자가 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참 지도력을 발휘할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만일 미래의 교회에 어떤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도자들이 기꺼이 인도를 받는 자리에 서려고 하는 가난한 교회에 거는 희망일 것입니다.

 

훈련 : 신학적 성찰

그러면 이렇게 팔을 벌리고 살려고 하는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훈련은 무엇입니까? 나는 철저한 '신학적 성찰'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제안합니다. 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제 1의 사랑에 계속 붙어있을 수 있게 했듯이, 또 죄의 고백과 용서가 우리의 목회를 공동체적이고 상호 관계를 유지하도록 했듯이 철저한 신학적 조명은 우리가 어디로 인도 받고 있는지 분별할 수 있게 합니다.

견고한 신학적 성찰이 없다면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심리학자, 사회학자, 사회 사업가의 아류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일상 생활의 스트레스나 긴장을 극복하도록 돕는 수많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뜻입니다. 신학적 사고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자신들의 시대에 우연처럼 보이는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성스러운 구원 사역을 표명하도록 훈련되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힘에 메달리지  않고 자신을 비워 종의 형태를 위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입는다는 것은 대다수 신학교들의 주요 관심사가 아닙니다. 우리 시대의 경쟁적이고 야망으로 가득한 세계의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마음과는  적대적입니다.

 

맺는 말

 

예수님은 우리에게 현실성에 대한 관심에서 기도하는 삶으로, 유명해지려고 근근하는 데서 공동체적이고 상호 관계적인 사역으로, 힘 위에 세워진 리더십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가 목회하는 사람들을 인도하시는지를 확실히 분별하는 그런 리더십으로 옮아가기를 요구하십니다.

나는 이제 당신에게 두 팔을 벌리고 낮은 데로 임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지도자, 연약한 지도자, 신뢰하는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지도자의 모습이 다가오는 세기를 맞이하는 당신의 가슴을 희망과 용기와 자신감으로 가득 채우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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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모든 것을 새롭게

(Making All Things New)

(헨리 J.M 뉴엔 지음 /윤종석 옮김. 두란노 90쪽 4500원)

 

 염려없는 삶이란 상상할 수 없는 우리의 일부가 되어버렸습니다. 걱정하지 않는 삶은 비현실적이며 - 더 심하게 말해 - 위험하다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염려는 우리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게 하고 미래를 준비하게 하며 임박한 위험에 대비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염려없는 삶,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제 1장은 염려가 일상 생활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제 2장은 우리의 파괴적 염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 즉 새롭게 할 수 있는 성령의 삶을

제 3장은 염려의 위력을 점점 상실하게 하고 성령의 재창조 사역을 가능케 하는 구체적 훈련

 

제 1장. - 이 모든 것

 

영적인 삶이란 지금 여기, 아픔과 기쁨의 한복판에서 사는 삶일 때만 진정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달라질 가능성이 없기에 현실적으로 내 인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런 체념의 상태는 성령의 삶에 대한 적극적 추구를 가로막습니다. 우리가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이런 모호하고 암울한 불만을 몰아내고 자신의 현 생활을 정직하게 가면을 벗고 숱한 자기 기만의 놀음을 용기있게 직시해 야 합니다.

"바쁘신 줄은 알지만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적잖은 경우, 전화의 첫마디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바쁘게 산다는 것과 중요한 존재라는 것이 아예 같은 뜻처럼 쓰일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일대 역설은 많은 사람들이 바쁘면서 동시에 권태롭다는 것입니다. 권태는 적개심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 바쁨이 어떤 것에 이용, 조작, 착취당한 기분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자신을 피해자로 보기 시작합니다. 나를 인간으로서 진정으로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 자들에게 억지로 떠밈려 온갖 일을 해야만 해야만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실, 최근의 과거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라곤 모든 일이 매우 굽해 보였고, 그 일도 다 처리할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 뿐이라고 솔직히 말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찬 듯하면서도 못다 차 있고, 바쁘지만 단절되어 있고, 모든 곳에 다 있되 집에만은 없는 이런 상태에 해답을 주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본래 속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기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영적인 삶을 살라는 그분의 부르심은, 집 잃고 염려하는 자신의 실존을 정직히 고백하고 그것이 일상 생활에 미치는 분열의 위력을 기꺼이 인정할 때에만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만 참 고향을 향한 열망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제 2장 /먼저 그의 나라를

 

우리의 염려투성이 생활 방식에 대하여 손을 떼고 고뇌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평온한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되 모든 것의 참 중심에 확실한 뿌리를 두기 원하는 그것이 곧 마음의 변화, 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 . . .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영적인 축복이란 텔레비젼의 게임 프로그램에서 거액의 상금을 타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새로워진 삶이란, 우리의 일상의 많은 사건을 더 이상 끝없는 염려의 원인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임재를 우리에게 알리시는 다양하고 풍요로운 방편으로 경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의 연속성에서 자신의 현 좌표가 어디인지 깨닫고, 성령의 삶이 내 안에서 더 강하게 자라게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성장입니다.

 

제 3장 구하라.

 

어리석은 삶에서 순종하는 삶으로, 번잡한 염려로 가득찬 삶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인도를 따를 만한 자유로운 내적 공간이 있는 삶으로 서서히 옮겨 가기 위해서는 영적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영적 훈련은 우리의 삶 속에서 순종이 실행될 수 있는 내적, 외적 공간을 만들려는 집중된 노력입니다.

 

      고독의 훈련

우리는 흔히 내적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외적 방해 세력을 이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혼자 있기가 어렵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내적 갈등을 대면하는 일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홀로의 시간을 도망치기 위해 공산에 젖거나 아예 잠에 빠지는 것입니다. 혹은 잠념과 싸우다 보면 결국은 필요 이상으로 잠념 자체에 더 주의를 쏟게 됩니다.

고독의 훈련에는 따로 구별된 사간과 공간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든 우리 심령 자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고요한 골방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분주하고 활동적인 삶의 한복판에서도 그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고독의 훈련은 우리로 세상 속에서 적극적인 삶을 살면서도 늘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무르게 해줍니다.

 

       공동체 훈련

고독의 훈련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서로에게 메달리는 오류를 피하고 하나님의 자유케 하는 음성을 들을 공간을 확보하게 됩니다. 공동체의 기반은 사람끼리 서로 끌리는 매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함께 나란히 부르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말이란 때로 나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한 경쟁의 도구가 될 때가 많습니다. 공동체 훈련은 그런 우리에게 함께 침묵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이 훈련된 침묵은 어쩔 줄 모르는 침묵이 아니라, 우리를 나란히 부르신 주님에게로 함께 시선을 모으는 침묵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듣는 중에 진정한 창조적 침묵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순종의 삶,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란, 내 안에서, 혹은 우리 가운에서 쉬지 않고 하시는 성령의 기도에 우리가 늘 깨어 반응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맺음말

우리는 염려 투성이의 삶을 이겨 나가기 위해, 분주하고 바쁘지만 동시에 권태, 적개심, 우울, 심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본 서에서 영적인 삶이란 염려로 가득 찬 실존의 한복판에서 찾아오시는 성령의 활발한 임재로 설명합니다. 이 임재의 훈련은 우리의 많은 관심사 한복판 속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방식으로 함께 있으려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들을 내가 두려울 때 매달릴 대상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공간을 만들어 갈 동료 인간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잘 계획된 단계, 즉 고독의 훈련과 공동체 훈련이야말로, "그의 나라를 구하는"구체적인 길로서, 염려의 위력을 서서히 와해시켜 우리를 쉬지 않는 기도의 세계를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대체로 영적인 삶을 시작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염려를 유발하는 세력이 워낙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령의 임재가 거의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훈련에 성실히 임하다 보면 새로운 굶주림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 새로운 굶주림이 하나님의 임재의 첫 신호입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에 계속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는 언제나 그 나라 안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게 될 것이며, 거기서 우리는 모든 것이 새롭게 되어가고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기쁨에 젖어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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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살아있는 기억매체

(The Living Reminder)

 

(헨리 J.M. 뉴엔 지음 / 성찬성 옮김. 성바오로 출판사  77쪽  1800원)

 

 

사목자들의 영적 자산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아둔하고 음침하며 미지근한 관료주의자가 되지 않고, 또 복안과 계획과 할 일들이 많음에도 활동 속에서 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막아주는 것인가? 과연 무엇이 사목자들을 활력있고 생명력 있고 활달하고 열정으로 충만하도록 지켜주는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항상 경이와 기쁨, 감사와 찬미의 정신을 간직하면서 설교하고 가르치며 상담하고 경축하게 하는 것인가?

본서는 사목과 영성간의 관계를 고찰하고자 하며, 또 어떻게 봉사가 곧 기도요 기도가 곧 봉사가 되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필자는 사목을 '기억'으로 보고 사목자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는 살아있는 기억매체로 보는 데서 이 고찰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리라는 것이다.  이 '기억하는 일'은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서가 명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기억하라'는 한마디로 함축할 수 있다.

(우리의 사목 현장은 과거의 음울했던 것을 잊고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는 것, 그러나 그 아픔을 기억할수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을 남길 수 있는 것이 신앙 아닌가?)

 

제 1부 // 치유하는 기억매체로서의 사목자

 

유태인 대 학살에서 살아 남은 엘리 위젤 - 과거의 아품을 들먹여 양심의 묵중한 죄책감으로 고문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들이 치유받음으로써 보다 더 지독한 참화를 예방하자는 것이다. 과거를 망각하는 사람은 숙명적으로 과거를 되풀이하게 된다.

의사들과 임상의들이 듣게 되는 것은 단순히 사건들 자체가 아니라 사건들에 대한 기억이며, 그 자신의 상처와 있는 그대로 마주 대하는 이들만이 치유받을 수 있다.

 

치유

사목자의 임무는 상처받은 과거의 기억들에 손길이 닿아 두려움 없이 그것들을 빛 속으로 되부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식에서뿐 아니라, 하나님의 역할을 맡으려 들고, 자신의 과거에 대한 심판관이 되며, 우리 자신의 두려움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제한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 당하시는 하나님의 고통과도 단절시키는 행위이다. 사목자의 일은 과거의 파괴적인 것으로만 여겨지던 기억들이 이제는 구속사건의 일부로 재활용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

 

치유자.

어떻게 내가 그 치유자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개개인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역사안으로 끌어올린다는 말인가?  이 질문의 핵심은 행위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존재에 관한 질문이다. 이것은 사목자가 말하는 특수한 도구와 기술과 기교를 습득함으로써 통달할 수 있는 기술적 전문성이 아니라, 일하고 쉬며, 먹고, 마시고, 기도하고 놀고, 활동하고 기다리는 등의 삶 전체를 포용하는 어떤 존재 방식인 것이다. 직업 사목자의 능력과 기술, 기교, 기획, 복안에 대한 지나친 확신은 우리 인격 그대로의 모습과 연결 접촉점을 두절시켜 버렸다.

`우리가 우리 이웃에서 어떤 것들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그분의 삶과 일단 연결을 맺게 되면, 우리는 의무 때문이 아닌 자유롭고 자발적인 응답으로 그분에 대해 이야기 하고 그분께 친미가를 부르고 그분의 위대하신 일들을 선포하게된다.

 

기억을 뒤살리는 이 일은 사목자들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얼마나 긴밀하게 결합시키고 있느냐에 의해서 실현된다.

끝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사시는 그리스도의 삶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볼 때 치유는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인간적 소외를 분쇄하고, 서로간에 깨어진 연결관계, 하나님과의 깨어진 연결관계를 복원시켜 주실 수 있다.

 

제 2 부  // 지탱하는 기억 매체로서의 사목자.

 

과거 상처들에 대한 기억이 우리에게 상터를 입힌 악을 재연하지 않도록 막아주듯이, 사랑에대한 기억 또한 나날의 고투 속에서 우리를 양육할 수 있다.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 사건들을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들을 현재에 끌어들여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들을 경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서의 핵심이다.

 

지탱

나는 가족과 함께 있을 때보다 집에서 떠나 있을 때, 편지를 통해 훨씬 더 친밀하게 나 자신을 표현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기억 속에서 상대방의 정신과 맞닿을 수 있으며, 상대방 안에서 언제나 통교를 심화시켜주고 그 실재와 접할 수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듣고 냄새맡고 접촉했지만 여전히 그분과 먼 거리에 있었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 참된 성령이 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신적 계시의 위대한 신비는 하나님이 비단 그리스도의 오심뿐만 아니라 그분의 떠나심을 통해서도 우리와 친교를 맺으셨다는 사실이다.

 

지원(支援)

사목자는 자신의 존재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재까지도 사람들에게 주님을 생각나게 만드는 방도들을 모색해야 한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는 예수의 말씀은 우리가 수행하는 모든 사목적 방문 속에 한 부분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사목이 거짓된 환희와 헤픈 흥분과 속 빈 낙관론을 부추기는 것이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분의 부재를 깨달으면서 그분의 현존을 발견하고, 그분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그분이 우리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지 않으셨음을 알게된다.

 

지주(支柱)

우리 사목자들의 효용도가 너무 높아져 그 결과로 현존 쪽은 과다하고 부재는 너무 빈약하며, 사람들과 너무 함께 있고 그들을 떠나는 일은 너무 적으며, 우리 몫은 지나치게 많고 하나님과 그분의 성령의 몫은 너무 작게 되어버린 것 같다.

필자가 호소하고 싶은 것은 다만 기도를 사람들의 손길에 닿지 않게 하는 창조적인 방편으로 삼았으면 한다는 것뿐이다.  

'사목자를 만나볼 수 있을까요"하는 질문에 '죄송합니다. 사무실에서 손님과 면담하고 계십니다."는 대답이 아닌, '기도중이거나, 오늘은 홀로 지내는 날이라서'라는 답이 나올 때, 이것이 그 상담자에게 더 큰 위안의 사목이 될 수있으며, 이것은 자신 뿐 아니라, 자신과 관계된 모든 이에게 똑 같은 위안과 함께함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사목자는 사목자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우리의 일,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장소들을 떠난다는 것이 여전히 힘들다, 하지만, 사목자는 기도의 침묵과 고독속에서 사목자가 된다.

 

제 3 부  // 인도하는 기억 매체로서의 사목자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라삐는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그대는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하고 대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는 살아있는 기억 매체인 사목자는 치유자요 지주(支柱)일 뿐 아니라 또한 안내자이기도 하다. 과거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현재의 우리를 지탱해주는 기억은 또한 우리를 미래로 인도하면서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준다.

 

안내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자기네 백성에게 비참했던 종살이 시절과 해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기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앞으로 정진하게 하고 또 기억을 그들의 행실로 기리도록 도전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잘못된 문화와 흔들리는 사회, 암흑의 세계 속에서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에게 희망과 확신을 주는 것은 곧 예수에 대한 기억인 것이다.

 

안내역할

알고 있는 깊은 신앙인들의 삶이, 힘없는 교리들보다 더 적절하게 현실의 삶을 대처하도록 영감을 준다. 허다한 믿음의 선진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명확히 보여준 남녀들의 삶의 이야기를 서로 들려줄 수 있는 한, 새로운 이야기들이 감추어져 있는 새 땅을 향해 전진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안내자.

우리는 간단한 토론, 우연한 몇 차례의 충고, 몇 가지의 교훈, 또 이따금씩하는 설교로는 사람들을 인도할 수 없다. 예언이 대결하고 영감을 줄 수 있는 것은, 예언자가 밤낮으로 자신의 삶을 인도해주는 그 영상을 토대로 이야기 할 때뿐이다.

내가 인도받고 희망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어떤 특별한 제안이나 조언 덕분이 아니라, 조언자들로부터 발산되는, 그들의 깨달음 훨씬 저편의 어떤 힘 때문임을 나는 더욱더 절감하곤 한다.

우리가 자신의 약점과 한계들을 압도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거룩하신 조언자인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통해 바쳐나오고 그 빛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정도로 우리가 투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사목의 위대한 신비인 것이다.

대다수 사목자들이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함께 머무는 훈련보다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함께 머무는 훈련에 훨씬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묵상의 소재라기보다 토론과 논쟁의 소재라고 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많은 사목자들이 탁월한 설교가요 유능한 상담자, 훌륭한 프로그램 진행자이지만, 자기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탐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편안한 기분으로 영성 지도를 베풀 수 있는 이들은 별로 없다.

 

우리는 흔히 집을 떠나 멀리 숨고 한동안 벙어리, 귀머거리, 장님 행세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것을 깨달은 사목자는 사람들에게 돌아와 맡은 사명을 겸손과 사랑으로 강화시켜 나간다.

             ---------------------------  요약 · 김형남목사 (강릉전원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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